"우리는 아직 높고 단단한 유리천장을 깨지는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 누군가가 유리천장을 깰 것이다"
2016년 11월 9일, 미국 뉴욕에서 '첫 여성 대통령'에 도전했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패배를 인정하는 승복 연설을 했다. 이날 그는 특별히 '젊은 여성'들을 향해 위로의 말을 건넸다.
[후후월드]
"여러분은 소중하고, 강력하며, 세상의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누려 마땅하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는 당부에 객석에선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4년 뒤인 2020년 11월 7일,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는 미국 최초의 여성 부통령 당선인이 된 카멀라 해리스가 순백의 정장을 입고 무대 위에 올랐다. 패자가 아닌 승자로서다.
4년 전 클린턴의 '눈물의 당부'를 염두에 둔 듯 그 역시 젊은 여성을 향해 특별한 메시지를 전했다. "저는 부통령직을 수행하는 첫 여성이지만 마지막은 아닐 것"이라며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얘기한 것이다.
해리스 스스로도 부통령이 마지막 공직이 될 것 같진 않다는 게 워싱턴 정가의 시각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나이(78세)를 감안하면 당장 다음 대선에 해리스가 차기 주자로 나설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젊은 데다 열정적인 연설 스타일로 대선 기간 '여자 오바마'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삶을 관통해온 '흑인 정체성'
카멀라는 1964년 자메이카 이민자 출신 아프리카계 교수 아버지와 인도계 이민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메이카는 1800년대 아프리카 흑인 노예무역의 주요 거점이었다.
카멀라의 부모는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에서 유학하던 중 흑인 민권운동에 참여하며 연을 맺었다.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카멀라는 자신을 '흑인'이라 인식하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대학도 '흑인 명문대'인 하워드대에 진학했다.
이후 로스쿨을 졸업한 뒤 변호사, 검사장, 주 법무장관을 거치며 각종 '최초' 기록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흑인으로선 처음으로 2003년 샌프란시스코의 지방 검사로 선출된 후 그는 미국 내 가장 진보적인 지방 검사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그는 자신을 '톱 캅(Top Cop)'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 했다. 경찰 지휘권에 대한 자부심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한때 시의 경찰서장을 기소할 정도로 거침없는 지방 검사였다.
사법체계 안에서 해온 민권운동
하지만 그는 사형 구형에 반대한다는 소신을 지켰다. 전 샌프란시스코 시장, 미국 상원의원, 오클랜드 시장, 샌프란시스코 경찰협회, 헤더 퐁 경찰서장까지 해리스에게 입장을 번복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해리스는 "흑인의 체포 비율이 너무 높다. 인종에 근거해 체포하거나 기소하지 말라"며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흑인이 시 인구의 8% 미만을 차지했지만, 경찰에 체포되는 용의자의 40% 이상이 흑인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행보는 바이든의 러닝메이트로 발탁된 주요 배경으로도 작용했다. 경찰의 과잉진압에 흑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잇따르며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나는 상황에서 바이든에게 그만한 부통령감이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 늘 좋은 평가만 따랐던 건 아니다. 지나온 행적을 두고 '정치적 기회주의'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특히나 본격적인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면서 이런 논란도 따라 커졌다.
샌프란시스코 검사 시절 사형 구형에 끝까지 반대했던 그는 정작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이 된 뒤에는 이를 철회했다. 또 2014년과 2015년에는 경찰의 총격에 사망한 흑인 사건에 대한 조사를 거부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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